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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수필은 2001년 문학사상 장편소설 문학상으로 소설가로 등단하신 경력도 있으신 강동우 박사님이 서울의대 동문회보에 게재되었던 내용이며, 저작권의 적용을 받습니다.
- 내 인생의 손목시계 -
강 동 우
올해 첫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늘 어려 보였던 초등학생 딸이 이제 중학생으로 한걸음 진일보한다니 애비로서 가슴 벅차 새해에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한참의 고민 만에 나는 결국 시계를 선택했다. 어린 시절 첫째는 스와치 시계를 몇 개 선물 받았었다. 가끔 출국할 때 면세점에서 큰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고, 알록달록한 색상이나 납작해서 부담스럽지 않은 게 아이의 취향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좀 고상한 어쩌면 어른스러움을 바랐던 탓인지 나는 제법 학생에겐 고가의 시계를 선물하게 됐다. 녀석도 이제 브랜드를 좀 아는 나이가 되었는지, 한눈에 고상한 분위기의 베이지색 시계에 아이는 다행히 무척 기뻐했다. 어쩌면 아이도 알록달록한 핑크빛을 좋아하던 꼬마공주에서 고상함을 배우는 10대 소녀로 성장하고 있나 보다.
요즘은 핸드폰에도 시계가 있고, 굳이 손목시계를 차야할 필요는 없는데 왜 내가 굳이 시계를 선택했는지 나는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에 한참 상념에 잠겨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시계는 내 인생에 참 많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아이에게 무언가 삶의 중요한 순간과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길 바라는 것 같다.
세월을 돌이켜 내가 나만의 시계를 가졌던 것은 9살, 정확히 33년 전의 일이다. 고향이 경남 마산(곧 창원과 마산, 진해가 통합된다는 기쁘면서도 씁쓸한 소식이 있어서 이번이 마산이란 표현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지만...)인 나는 삼촌댁이 부산인지라 부산나들이를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부산의 번화가인 광복동의 어느 백화점에서 내 인생의 첫 시계를 사주셨다. 현재와 비교하자면 스와치처럼 화사한 시계였는데, 시계와 시계줄은 노란색에 시계 판에는 미키마우스가 긴 팔로 시침을, 짧은 팔로는 분침을 가리키던, 그 당시로는 시골 촌놈에게 참 호사스런 것이었다. 학교 아이들에게도 부러움을 크게 받았으니 말이다. 아홉 살 꼬마는 그 소중한 시계가 고장 날까 수시로 째깍거리는 소리를 확인했고, 잘 때도 엎드려서 귀에 시계를 대고 자기도 했다. 규칙적으로 째깍거리는 시계소리에 중독됐었는데, 그 소리가 무언가를 연상시켰던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꽤 오랜 세월이 흘러 깨달았다.
덧붙여 시계를 사자마자 부모님은 전혀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굉장히 분주한 서양식 식당이었는데, 시골 촌놈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돈까스와 샐러드를 먹어봤고 칼로 써는 새 음식문화를 경험했었다. 나는 그 날을 잊을 수 없어 조각난 기억을 모아 20대 초 부산에 들러 그 식당을 찾아봤지만 도무지 어딘지 찾을 수가 없고, 부모님께 여쭸더니 그저 광복동이란 것은 맞다고 신기해 하셨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기억이 떠올랐는데, 내 두 번째 시계는 정확히 5년 후다. 아버지와 어느 시계방을 찾아 제법 어른스러운 쇠줄시계를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선물 받았다. 신기하게도 지금 내가 딸아이에게 중학교 입학 기념의 시계를 선물한 그 시점에 말이다. 나의 기억과 인생은 돌고 도는 시계처럼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내게 전해져서, 다시 내가 아버지가 되어 딸아이에게로 전달되나 보다.
이번엔 8년이 흘렀다. 기억속의 세 번째 시계는 의대생 시절 연애하던 세련된 서울 여대생으로부터 받은 연애감정 가득 담긴 것이었다. 고가의 시계였는데 그 여대생과는 2년 남짓 연애 끝에 결별하게 되었지만, 참 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시계였다. 그 시계는 오랜 시간 치열한 의대의 시험시간을 함께 했다. 그 시절 시험 때의 시계소리는 공포와 불안을 준 것이어서 흐뭇하지 않다. 더욱이 부정적 기억은 반복됐다. 본과 1학년 학년말 기말고사를 3일 앞둔 밤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어머니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비극 3일전 어머니는 내게 마지막 전화통화를 하셨다. 그것도 새벽에 말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분이라 처음엔 무슨 응급상황인가 깜짝 놀라며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1시 반이었다. 자초지종인즉 마산의 교육청 장학사였던 어머니는 교육신문을 편집하시는 일도 맡아하셨는데, 당신은 신문원고 마무리하다보니 늦어졌고 보고 싶다고 하셨다. 기말고사 잘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편히 쉬라 하셨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고 작별인사였다.
비보를 듣고 밤새 차를 몰아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시계를 보고 또 봤다. 1분이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짧은 3일장 내내 나도 모르게 손목시계의 용두를 돌려 시계바늘을 자꾸 거꾸로 돌려보는 강박증상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계는 째깍거리며 앞으로 나갈 뿐 되돌아가지 않았다. 내 인생에 그때만큼 째깍거리는 시계소리가 원망스러웠던 적 없다. 선산에 도착해 하관식 때 나는 취토를 하면서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았던 그 시계를 어머니의 관과 석곽 틈새에 끼워 넣었다. 당시에 가장 내 곁에 가까이 있었던 물건이어서 그랬다. 나이든 어른들이 관 옆에 쇠붙이를 놓으면 안 된다고 야단을 하셔서 한참을 싸웠고 눈물범벅이 되어 끌려나왔다. 무심한 그들은 가차 없이 봉분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49제가 지나갔다. 어머니가 교육문제로 인터뷰를 하며 인연을 맺었던 스님이 주지로 있던 조그만 암자에서 49일을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울방학이기 때문이었다. 49제가 끝나고 당시의 여자친구는 조심스레 내게 물건 하나를 내놓았다. 그건 바로 영원히 어머니 곁에서 재깍거리고 있을 줄 알았던 여자친구가 선물한 바로 그 손목시계였다. 다행히 여자친구는 내 마음을 이해해줬지만 나는 그 시계를 아니 어떤 손목시계도 한동안 차지 못했다. 늘 그 시계는 내 침대 맡에 놓여 있었을 뿐.... 그리고 어머니와 사별 후 내게는 참으로 기나긴 방황이 시작되었다.
긴 방황의 끝에 나는 시계를 또 하나 선물 받았다. 바로 동문이자 내 아내인 백선생과의 연애시절 때다. 함께 캐나다의 학회를 다녀오는 길에 백선생은 면세점에서 내게 시계를 골라보라 했다. 사진 속의 시계인데, 같은 모양에 시침과 초침만 있는 조금 저렴한 것도 있었지만, 나는 주저 않고 상대적으로 비싼 이 시계를 선택했다. 이런 형태의 시계를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라고 하는데, 모양이 예뻤던 탓도 있지만, 이런 저런 기능의 바늘이 많아서 째깍거리는 바늘소리를 내키는 대로 실컷 듣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게다가 크로노그래프는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사진찍기를 좋아했던 나는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새 시계를 병원의 화단 흙바닥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바로 첨부한 이 사진이다. 어머니의 관 옆에 시계를 놓았던 그 시절의 슬픔을 떠올리며 말이다.
백선생은 천상 정신과의사다. 내 얘기를 정말 잘 들어준다. 나는 가끔 침대에 누워 자연스런 정신분석도 공짜로 받는다. 아니 요즘 번 돈으로 이것저것 명품시계도 여럿 사줬으니 꼭 공짜가 아닌지도 모른다. 시계와 관련된 이 모든 내면은 미국에서 연수할 때 교육 분석을 받으면서 일부나마 찾을 수 있었다.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에 내가 그렇게 심취했던 이유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들었던 어머니의 심장소리인지도 모르겠다고 연상했던 적 있다. 어쩌면 나는 규칙적이며 일관된 그 시계소리를 통해 그 무슨 근원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일관성(consistency)인 듯 하다.
어느덧 나도 남아있는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은 나이가 되었다. 내 인생의 시계는 멈추지 않고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 내 인생의 손목시계는 손목을 옥죄는 수갑이라기보다 소중한 기억들의 상징이다. 어쩌면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며 내 인생이 엮어져왔듯, 아버지가 그랬듯 어머니가 그랬듯 나도 내 아이에게 시계를 선물하고 그렇게 기억되길 바라나 보다. 일관성을 바라며 말이다. 또 몇 년이 지나면 지금은 장난감 시계를 가진 둘째에게도 시계를 선물하게 될 것 같다. 한해가 끝나고 또 새해가 찾아왔고, 그렇게 돌고 돌지만 어떤 큰 흐름이 있는 게 인생인가 보다.
의학박사, 전문의, 소설가 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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