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제 어깨는 무겁기만 합니다.”

아내와의 섹스리스 문제로 필자의 진료실을 찾은 J씨는 40대 중반 남성이다. 아울러 그는 다소 전통적인 집안의 장남이다. 기대와 관심이 J씨의 깊은 내면엔 부담이었다.

J씨의 ‘장남살이’와 성생활을 피하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는 성기능에 심각한 육체적 문제는 없다. 다만 왠지 성생활이 즐거움이 아니라 부담이나 의무라고 한다.

책임감이 강한 J씨의 내면을 분석하던 중 그는 제법 독특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겨울날 고속버스터미널의 넒은 마당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을 박사님은 아시나요? 고향 부모님이 서울을 찾으시면 저는 항상 터미널로 나갑니다. 동생들을 보내도 되는데, 장남인 제가 꼭 마중을 가야 할 것 같았고… 한번은 아주 추운 눈 오던 날이었는데 버스가 늦게 도착했고, 저는 그 칼바람을 맞으면서 두 시간을 밖에 서 있었어요.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혹여 제가 보이지 않으면 부모님이 섭섭해 하시거나 걱정하실까 봐요.”

따뜻한 대합실에 앉아 있으면 왠지 효심이 부족한 아들이 되는 것 같았다던 J씨. 그는 동생들의 어려움도 친구들의 불행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회사에서도 책임감이 강하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욕심도 많다.

가정에서도 아내의 기대에 부응하는 훌륭한 남편이기도 한 J씨는 정작 본인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원초적인 본능은 등한시한다. 주변의 요구에만 자신을 맞추다 보니 나 자신은 없다. 그에겐 성행위가 나의 즐거움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아내를 만족시키는 또 다른 의무다. J씨는 단순히 아내와의 성행위가 재미없고 식상해 섹스리스가 된 게 아니다. J씨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섹스리스 남성들에게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좀 내려놓고 나 자신을 위하시지요.”

장남 특유의 책임의식, 성취욕, 목표 지상주의, 감정절제는 심리적 원인에 따른 성욕저하나 심인성 발기부전, 지루 등에 악영향을 준다.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자연스러운 성반응을 막게 되고, 평소의 감정절제가 성반응의 표출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J씨는 좀 심한 경우며 굳이 장남이 아니라도 책임의식,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장남형’ 남성들은 성기능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일상적인 책무엔 대부분 성실하지만 원초적 성 기피로 ‘가정에 소홀한 나쁜 남편’이란 배우자의 비난이 따라붙는다. 또한 아이를 낳고 식구가 늘면서 양육 책임과 사회적 도태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무의식을 강하게 지배한다.

다가온 설 명절도 장남형 남성들에겐 그 특유의 의식이 강화되는 시기다. 묵묵히 책임을 다하다 보니 겉으로는 굳이 티가 안 날 수도 있지만, 그들의 무의식은 책임의식 때문에 남편 명절증후군을 겪는다.

남성들은 성생활이 힘들면 정력제를 먹거나 인공적인 발기약만 쓰려고 한다. 하지만 J씨처럼 심인성 성기능장애에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심리적 문제라면 무조건 막연하고 모호하다고 여기지만, 당사자의 성격적 특성과 심리적 배경까지 잘 다뤄주면 치료는 의외로 쉽다. 항상 권위를 지켜야 하고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는 내 남편, 사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숙명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물밑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불쌍한 백조일 수 있다. 오히려 만사 내려놓고 편히 나서면 쉽게 물에 뜰 수 있는데도 말이다.

서울대 의대 출신 전문의(醫) 부부. 한국인 의사 최초로 미국 킨제이 성 연구소와 보스턴·하버드 의대에서 정신과·비뇨기과·산부인과 등 성(性) 관련 분야를 두루 연수, 통합적인 성의학 클리닉·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강 박사는 2005년 국제학회에서 발간한 여성 성의학 교과서의 공동집필자다.